책 소개
녹슨 철판 위에서 피어난 시간의 얼굴: 박정화의 사진집 《Time Flower》
이 책은 사진가 박정화가 부산의 바다와 골목에서 발견한 ‘시간 꽃’의 기록입니다. 조선소 수리대에 올려진 낡은 배, 골목길 허름한 양철 대문—그 위에 켜켜이 슨 녹은 작가에게 단순한 부식이 아니라 시간이 스며들어 피워낸 꽃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생명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같은 배라도 같은 대문이라도 저마다 다른 색감과 무늬로 피어난 녹의 얼굴들을 한 권의 사진집으로 엮어냈습니다.
책에는 사진가 김홍희의 평론 <시간 꽃> 시공을 넘어가 함께 실려, 박정화의 이미지를 철학적·물리학적 사유로 확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에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말한 ‘존재하지 않는 시공’까지—평론은 <시간 꽃> 연작의 사진 한 장 한 장이 어떻게 저마다 완벽히 다른 개성으로 승화하는지를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틀을 빌려 풀어냅니다. 이는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색으로 독자를 이끄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작가의 글 ‘의문에서 시작한 나의 사진’에는 해운대 청사포 바닷가, 기장 칠암 바다, 수영만 요트경기장, 영도 깡깡이 마을, 그리고 경남 곳곳을 오가며 녹을 보고 또 보았던 작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사진집은 2026년 부산문화재단의 사진집 발간 지원사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다 같으면서 다 다르고 다 다르면서 다 같은 시간의 흔적들을 통해 독자 각자의 기억과 시간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작가 생각 중에서]
나의 사진은 의문에서 시작한다. 오래된 것을 새롭게 볼 수는 없을까.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생명이 발아할 수는 없을까. ‘시간 꽃’은 길고 깊은 의문 끝에 얻은 답이었다. 낡은 철판에서 부식하는 녹을 통해 해답의 일단에 다가갔다.
우연이었다. 조선소 수리대에 올려진 낡은 배에 눈이 간 건. 골목길 허름한 양철 대문도 그 무렵 눈에 들어왔다. 배와 대문에 칠한 페인트가 벗겨지면서 여기저기 슨 녹은 색감이 다 다르고 모양이 다 달랐다. 배마다 다르고 대문마다 달랐으며 같은 배라도, 같은 대문이라도 다 달랐다. 그것은 경이였다. 악조건을 견디고서 약동하는 생명체였으며 발아하는 꽃이었다. 약동하는 생명체, 발아하는 꽃은 어디에도 있었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결국 시선의 문제였고 관심의 문제였다.
부산 해운대 청사포 바닷가로, 기장 칠암 바다로,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영도 깡깡이 마을로, 그리고 경남으로, 더 멀리로. 보고 또 봤다. 보고 또 보면서 그들과 대화했고 보고 또 보면서 그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들은 꽃보다 꽃이었다. 가장 덥다는 날에도 여전히 파릇했으며 가장 춥다는 날에도 여전히 파릇했다. 여전히 파릇할 수 있었던 힘은 시간에서 나왔다. 그들이 감내한 시간이 길었고 오래됐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고 감내한 시간이 길수록, 오래될수록 더 많은 꽃, 더 눈이 가는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시간 꽃이었다.
서평
시간이 머문 자리, 녹슨 철판에서 당신의 기억이 발아합니다
녹은 보통 쇠의 죽음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박정화의 사진 앞에서 녹은 오히려 가장 오래 견딘 것들만이 피워낼 수 있는 꽃이 됩니다. 조선소의 낡은 배, 골목의 양철 대문—버려지고 낡아가는 것들의 표면에서 작가는 저마다 다른 색과 무늬로 피어난 시간의 얼굴을 발견해냅니다. 이 책은 그 발견의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눌러 담은 사진집입니다.
김홍희의 평론은 이 사진들을 단순한 다큐멘터리 이미지로 두지 않습니다. 뉴턴의 절대 시공,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적 사유를 경유하며, 왜 같은 녹인데도 각각의 사진이 철저히 다른 개성으로 탄생하는지를 묻습니다. 변화는 분명하되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물리학적 은유는 독자로 하여금 한 장의 이미지 너머 우주의 시작과 끝, 그리고 우리 존재 이전까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오래된 것들 곁을 무심히 지나쳐온 분들, 지나간 시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문득 궁금해진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해운대 청사포에서 영도 깡깡이 마을까지 작가가 보고 또 본 끝에 건져 올린 ‘시간 꽃’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 안에도 오래 품어온 기억의 굽이굽이가 조용히 꽃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자 소개
박정화
옆을 보며 뒤를 보며 지나간 시간의 이면을 사진에 담아 왔다. 인도 한 달을 담은 <인도 기행>(2001년)을 시작으로 개인전 8회, 몽골 <울란바타르展>(2024년)과 <배부장과친구들>(2026년) 등 단체전 10회를 가졌다. 2026년 부산문화재단의 사진집 발간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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