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부산, 현실, 그리고 리얼리즘 회화의 날 선 기록: 방정아 개정판
이 책은 1993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최전선에서 일상과 사회를 예리하게 포착해 온 화가 방정아의 개정판 작품집입니다. 초판(2012) 이후 작가가 선보인 신작들과 더불어, 그녀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현실’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출품한 <플라스틱 생태계>, 700×1320cm 규모의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등 대형 설치 작업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걸개 그림을 연상시키면서도, 동시대 생태·핵·여성의 문제를 시각서사와 공간 경험으로 통합한 성취를 보여줍니다. 부산대 조선령 교수의 신작 비평과 미술평론가 강선학의 글은 방정아 회화가 사진이나 문학서사와 구별되는 ‘시각서사’의 힘을 어떻게 발휘하는지를 섬세하게 해명합니다.
방정아 회화의 핵심은 일상 속 ‘발견’의 순간입니다. 집을 나온 여자가 밤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는 순간, 공중목욕탕에서 피멍 든 몸을 감추려 애쓰는 순간, 헬스장에 검은 옷을 입고 느닷없이 서 있는 여자의 어색함, 그리고 2010년대 이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불구불한 선과 착시로 뒤엉킨 식물·인물·동물의 얽힘—이 모든 장면은 ‘현실 같은데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의 정합성을 잃은 상황’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평론가 조선령은 “방정아의 작업은 최근의 퇴행적인 개인주의적 취향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개인의 그물이 얽어내는 미세한 풍경을 놓치지 않는 어떤 성취의 지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합니다. 작가는 미술대학에서 배운 기법을 점점 잊으려는 듯 ‘언러닝(unlearning)’의 과정을 거쳐, 선-색채-형태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 평평하면서도 깊이를 지닌 화면으로 나아갑니다.
이 책에는 <집 나온 여자>(1996), <급한 목욕>(1994), <고독함의 상쾌한 매력>(2001) 같은 초기 민중미술·여성주의 시기 대표작부터, <관세음보살> 연작, 재개발 지역 풍경, 그리고 2020년대 <욕망의 거친 물결>,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등 최신작까지 망라되어 있습니다. 192쪽에 걸쳐 작품마다 작가가 직접 쓴 짧은 텍스트가 곁들여져, 그림과 글이 시서화(詩書畵)처럼 융합되는 독특한 감상 경험을 선사합니다. 부산이라는 장소, 여성이라는 위치, 그리고 리얼리스트로서의 태도가 어떻게 한 화가의 화면 위에서 살아 움직여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아카이브입니다. 한국현대미술선 009번으로 출간된 이 개정판은 방정아 회화가 단순한 일상의 재현을 넘어 ‘세계의 역량에 참여하는 회화의 모험’임을 생생히 증명합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조선령 평론 중에서]
메를로-퐁티의 말처럼 회화가 세계에 육체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라면, 방정아의 최근 작업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다. 그림의 표면은 화가의 몸을 경유해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의 살이다. 사진이 사진가의 눈-두뇌를 세계에 빌려주는 방법이라면, 회화는 화가의 세포와 근육과 뼈를 세계에 빌려주는 방법이다. 한 장의 사진이 사진가의 정신적 스크린이라는 점에서 사진 역시 세계에 참여하는 방법이지만, 화가의 붓자국은 매순간 중첩되고 흩어지는 감각의 층들을 쌓아올린다는 점에서 특유의 내밀한 육체성과 시간성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화가의 모든 캔버스는 신체 내부에서 그려진 자화상이다.
방정아의 최근 작업들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회화의 답변을 보여준다. 말하는 것은 화가가 아니고 등장인물도 아니다. 회화가 스스로 말한다. 이 언어는 명료하지 않고 지름길이 없다. 항상 우회하는 길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곧, 질러가는 길은 애초에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회’는 우리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서평
부산스러움, 얕은 물의 깊이, 그리고 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
방정아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낯설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장면과 마주합니다. 집을 나온 여자가 밤거리에서 어묵을 먹는 순간, 공중목욕탕 탈의실에서 재편되는 권력 관계, 헬스장에 검은 옷 입고 느닷없이 서 있는 여자의 어색함—이 모든 순간은 ‘현실 같은데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의 정합성을 잃은 상황’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평론가 김준기는 “방정아 서사는 문학서사와는 차별화한 시각서사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 민중미술과 여성주의 회화에서 출발한 작가는 부산이라는 도시와 일상 속 여성들의 삶을 빠른 붓놀림과 내러티브로 포착해 왔고, 2010년대 이후 화면은 점차 평평해지면서도 착시와 위장의 깊이를 얻게 됩니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식물과 인물과 동물이 서로 뒤엉키며, 원근법적 질서는 해체됩니다. 이 변화는 ‘언러닝(unlearning)’—미술대학에서 배운 기법을 점점 잊으려는 과정—을 거쳐 얻어진 새로운 리얼리티입니다.
평론가 강선학은 “얕은 물의 깊이, 잴 수 없는 하찮은 것들의 깊이를 보아내거나 경악하면서 느끼는 온전한 것의 접면에 대한 경험”이라 말합니다. 물가에 서 있는 관세음보살, 호랑이가 다가오는데도 무표정한 여인, 침대 시트가 파도처럼 출렁이는 방—이 엉뚱하고 우발적인 장면들은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부조리한 것들이 엄연한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의 경험’입니다. 작가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700×880cm 규모의 <플라스틱 생태계>를, 2022년에는 730×1320cm의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를 선보이며 회화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감각을 동시대적 방식으로 소환합니다. 평론가 조선령은 “방정아의 작업은 사회와 개인의 그물이 얽어내는 미세한 풍경을 놓치지 않는 성취를 보여준다”고 평가합니다.
일상, 여성, 부산, 생태, 핵—이 모든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192쪽에 걸쳐 작가가 직접 쓴 짧은 글과 함께 배치된 작품들은 시서화(詩書畵)처럼 그림과 문자언어를 탁월하게 통합합니다. 평론가 박영택은 “작가란 존재는 그 시대의 지진계이자 당대의 모든 삶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해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응하는 이라는 인식은 방정아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썼습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여러분은 리얼리즘 회화가 여전히 우리 삶의 가장 미세한 풍경을 포착하고 세계의 역량에 참여하는 강력한 방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방정아의 회화 여정은 한국 동시대미술이 어떻게 현실과 호흡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저자 소개
방정아
1968년 부산 출생. 199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2009년 동서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졸업.
2024년 <빛나는 핵의 바다_논베를린>(마인블라우 프로젝트라움, 베를린), 2023년 <욕망의 거친 물결>(신세계 갤러리, 부산), 2019년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부산시립미술관), 2017년 <꽉, 펑, 헥>(자하미술관, 서울) 등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2022년 <좀비주의>(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21년 <올해의 작가상 2021>(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8년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아시아문화의전당, 광주), 2015년 <한국미술 1965~2015>(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일본), 2007년 <민중의 고동 – 한국미술의 리얼리즘 1945~2005>(국립현대미술관 / 반다이지마미술관, 니카타 /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등)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하였다. 제13회 구본주 미술상(2023), 제13회 부산청년작가상(2002)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광역미술관, 경남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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