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서사들: 천승세가 빚어낸 인간 풍경의 기록
이 책은 소설가 천승세가 1958년 등단 이후 남긴 중·단편소설 중 대표작 열 편을 엮은 작품집입니다. 표제작 <신궁>과 <혜자의 눈꽃>을 비롯해 <오동추야>, <사비선생>, <이차도 복순전>, <인천 비 서울 비>, <꿈길밖에 길이 없어>, <천사의 발>, <만월>, <신월동 타령>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1970년대 후반의 변두리 서울과 섬마을을 배경으로, 가난과 상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그려냅니다. 독자들은 작가가 직접 목도한 시대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천승세는 소설가 박화성의 아들로 태어나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점례와 소>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64년에는 희곡 <만선>으로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모집 당선, 1989년에는 시인으로도 등단하는 등 소설, 희곡, 시를 아우르는 문학 세계를 펼쳤습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그가 신문기자와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가까이서 지켜본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둡고 습한 뒷골목, 그리고 남도 섬마을의 토속적 정서를 깊이 있게 담아냅니다. 당골레의 신명과 원한, 객주의 탐욕과 어부들의 한, 도시 변두리의 궁핍한 삶 속에서도 지켜지는 인간의 체면과 자존심이 작가 특유의 토속어와 생생한 대화로 되살아납니다.
이 작품집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질문들을 던집니다. <신궁>의 당골레 왕년이는 억울하게 남편을 잃고도 굿손을 놓지 못하는 여인이며, <이차도 복순전>의 귀향이는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젊은 여성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가난이 죄가 되고 신분이 운명을 결정짓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않는 생의 의지는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신궁> 중에서]
왕년이는 옥수의 머리통에서 바가지를 벗기다 말고 끝내는 목줄이 당겨오던 것이었다.
옥수는 바가지를 쓰고 앉았던 그 꼴을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슴도치처럼 죽쳐 쭈그린 채였다. 그런 남편의 볼을 흥건하게 적시며 핏줄과 범벅이 된 눈물줄이 연신 달아내리고 있는 거였다.
“……우덜 해룡환은 으디로 갔능겨…… 으디로 흘러가 뿌졌어.”
“치이, 당골레헌테도 손재살은 끼능 거여…… 믓을 을매나 자알 잡쉈다고 지서 행보는 해갖고 핏줄이나 터져 온당가…….”
왕년이는 한바다를 가늠하고 선 채 명치 끝이 찌르듯 아파 왔다.
“괴기 읎는 데서는 당골레도 못 사능겨. 묵을 것이 읎어…….”
왕년이가 가늠한 곳은 철문살이 낀 상도의 쥐바위였다.
화살은 하늘을 가르고 날아 쥐바위 귀뿌리에서 쇳소리를 냈다.
굿판이 웅성대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였다.
바가지를 쏘고 굿청에 떨어졌어야 할 화살은 바가지 깊숙이 꽂혀 끝대를 떨었고 판수는 바가지를 쓴 채 비식 옆으로 누웠다. 바가지 위로 꽃뱀 기듯 핏줄이 흘렀다.
서평
가난과 한恨이 빚어낸 인간 군상, 그 처절하고도 뜨거운 생의 기록
천승세의 소설은 독자를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데려갑니다. 서울 변두리 판잣집 골목의 습기 찬 공기, 남도 섬마을 선창가의 비린내와 굿판의 징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작가는 그들의 말투와 몸짓, 억양까지 고스란히 담아내며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그들과 함께 숨 쉬는 증언자의 자리에 섭니다. <신궁>의 왕년이는 남편을 잃고도 생계를 위해 굿판에 서야 하는 당골레이며, <사비선생>의 최 종복은 땅을 빼앗기고도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는 떠돌이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으며, 가난하지만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언어는 투박하지만 정확하고, 거칠지만 따뜻합니다. 남도 사투리와 토속어를 그대로 살려 쓴 대화들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곧 독자를 그 시절 그 자리로 데려가는 강력한 시간여행의 도구가 됩니다. 특히 <신궁>에서 왕년이가 굿판에서 읊는 축문과 사설, <이차도 복순전>에서 귀향이가 내뱉는 허황한 거짓말들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 그들 삶의 비극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천승세는 소설뿐 아니라 희곡과 시까지 넘나든 작가답게, 인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리듬과 정서를 담아내는 데 탁월합니다.
지금, 삶의 무게에 지쳐 있거나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천승세가 그려낸 인물들은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왕년이는 신궁의 화살로 복수를 완성하고, 최 종복은 백쥐와 함께 다시 떠돌며, 귀향이는 거짓 다이아몬드를 안고도 다시 일어섭니다. 이 작품집을 덮는 순간, 당신은 삶이란 결국 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며, 그 견딤 속에 인간의 존엄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천승세가 남긴 이 뜨겁고 처절한 인간 풍경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저자 소개
천승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소설가 박화성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점례와 소’가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물꼬’가 입선하고 같은 해 3월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 모집에 ‘만선(3막 6장)’이 당선되었다. 1989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시 ‘축시춘란’ 외 9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포대령’ ‘황구의 비명’ ‘낙월도’ ‘이차도 복순전’ ‘혜자의 눈꽃’ ‘신궁’ 등이 있으며, 60여 편의 중〮단편, 5편의 장편소설과 미완의 장편 3편, 희곡 ‘만선’ 등과 <몸굿>, <산당화> 2권의 시집, 4권의 수필집, 3권의 꽁뜨집 외 다수가 있다.
신태양사 기자, MBC 전속작가,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이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과 회장단 상임 고문을 역임했다.
1965년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1975년 제2회 만해문학상, 1982년 제4회 성옥문화상 예술부문 대상, 1989년 제1회 자유문학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암으로 투병 중 전신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약 2개월 와병 후 2020년 11월 27일 자정을 막 넘긴 시각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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