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내 몸에 기생하는 수천의 타자들, 이피가 그려낸 괴물 같은 자화상
이 책은 미술가 이피의 다섯 연작 <천사의 내부>, <내 얼굴의 전세계>, <이피의 진기한 캐비닛>, <Her Body Puzzle>, <나의 서유기>를 한데 모은 작품집입니다. 작가 자신이 쓴 세 편의 작가노트와 국내외 평론가 세 명의 비평이 함께 실려, 이피의 작업을 둘러싼 질문들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한지 위에 먹과 금분으로 그린 회화부터 혼합재료 설치, 마른 오징어와 황태포 같은 낯선 재료를 쓴 조각까지,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 전반을 한 권에 담았습니다.
전하영은 이피가 매일 일기처럼 그려온 드로잉이 어떻게 정교한 대형 페인팅으로 변용되는지, 그 우연과 반복의 작업 방식을 세밀히 짚어냅니다. 황록주는 화려한 색채와 파격적인 재료 이면에 숨은 외로움과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이피가 최근 배우기 시작한 불화 수행과 연결지어 읽어냅니다. 노트르담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조이엘 맥스위니는 이피의 작업을 ‘미디어에 사로잡힌 신체’라는 틀로 분석하며, 과포화된 이미지와 텍스트가 어떻게 하나의 몸을 이루는지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으로 함께 소개합니다.
이피의 작업 속에서 몸은 하나의 전체이자 동시에 수백 개의 부분이며, 나는 언제나 나 아닌 것들이 와서 부딪히고 기생함으로써 비로소 ‘나’가 됩니다. 핀란드의 핵폐기물 저장소에서 시작된 상상이나, 심해 생물에서 건너온 오징어의 형상, 거울 속 이방인이 된 자신의 모습까지, 이 책은 하나의 커다란 자기해부의 기록입니다. 설치되었다 사라지는 작품들을 이미지와 글로 영구히 붙잡아 둔 이 책은, 이피라는 작가의 뿌리와 변화를 처음부터 가늠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귀한 지도가 되어줄 것입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작가노트 ‘나의 서유기’ 중에서]
나는 거슬러 가고 싶다. 일상의 단면, 그 한 순간을 정지시켜 공예품을 만든 듯한 이즈음의 미술 작품들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나는 긴긴 시간을 실패처럼 둘둘 감아서 들고 가고 싶다. 나는 작품에 깃들인 시간을 자르지 않고 뭉치고 싶다. 나는 온갖 생필품들을 가득 짊어지고 이 동네 저 동네를 기웃거리는 보부상처럼 작품 하나마다 나의 서사를 탑재하고 싶다.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서사 꾸러미를 짊어지고 힘겹게 이 세상을 헤쳐 나아가고 싶다.
나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10권으로 완간된 오승은의 <서유기>를 일 년 째 천천히 읽고 있다. 삼장법사 일행이 저승에 도착했으나 환생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가고 있다. 내가 아직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아직 서역에 도착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다. 매순간 위험한 모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서평
피부 안쪽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을 끝내 그려내는 사람
이피의 작업 앞에 서면 우리는 아름다움과 역겨움, 매혹과 공포 사이 어디쯤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핑크빛으로 빛나는 피부 표면과 검붉게 갈라져 피 흘리는 몸의 내부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그 양가적인 감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작가 자신의 목소리와 평론가들의 분석을 통해 차근차근 따라가게 해줍니다. 매일 밤 일기를 쓰듯 그려낸 작은 드로잉이 어떻게 거대한 설치와 페인팅으로 자라나는지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입니다.
이 책의 미덕은 세 명의 비평가가 서로 다른 언어와 시선으로 이피의 작업에 다가간다는 데 있습니다. 전하영은 영화와 우연성의 미학으로, 황록주는 이방인의 몸과 불화 수행이라는 종교적 맥락으로, 조이엘 맥스위니는 미디어와 신체, 탈경계의 정치학으로 각기 다른 문을 열어줍니다. 그 결과 독자는 이피의 작품을 단지 기괴하거나 화려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자아와 타자, 안과 밖, 동양과 서양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치열한 사유의 장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해 괴로웠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피가 만들어낸 기형의 생명체들 속에서 뜻밖의 위안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여러분의 피부 아래에도 이름 붙여지길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라지는 설치미술을 영원한 기록으로 붙잡아 둔 이 책을, 자기 안의 낯선 타자들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권합니다.
저자 소개
이피
이피(李徽)는 시카고예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순수미술 학사(2005)와 아트 앤드 테크놀로지 전공 석사(2007) 학위를 받았다. 2007년에는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국립미술학교(l’École Supérieure d’Art d’Aix-en-Provence)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1997년 갤러리 바탕골에서 첫 개인전 <눈, 코, 입을 찾아 떠난 사람>을 연 이후 <Skin & Out>(2006, Caladan Gallery), <Monkey to the West>(2010, Gallery Artlink), <Her Body Puzzle>(2011, 논밭갤러리), <이피의 진기한 캐비닛>(2012, Gallery Artlink), <내 얼굴의 전세계>(2014, Gallery Artlink), <천사의 내부>(2016, Trunk Gallery)에 이르기까지 열 번째 개인전을 이어왔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4),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2011)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하였으며,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 Young Art Frontier Grant를 수상하였다. 작품은 코오롱, 논밭예술학교, 대화문화아카데미,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