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종이 위에 그린 글자들, 혹은 써내려간 그림: 이건희 작가의 문자와 이미지가 만나는 칼리그램의 세계
이 책은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에서 독특한 회화 세계를 펼쳐온 이건희 작가의 <리버스(rebus)> 연작(2012-2013)을 집대성한 작품집입니다. 단순한 도록을 넘어, 민병직(미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깊이 있는 비평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을 수록하여, 작가가 천착해온 ‘문자성과 조형성’, ‘의미와 이미지의 교차’라는 문제의식을 치밀하게 해부합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직접 제작한 수제 한지 위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어떻게 비가독적인 기호의 범람으로 가득한 디지털 시대의 풍경을 담아내는지, 그리고 그 속에 작가의 일상과 무의식, 삶의 흔적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체화되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민병직의 비평은 이건희 작업의 미술사적 좌표를 선명히 제시합니다. 그는 작가가 한지의 물성 탐구에서 출발해 기록매체로서의 종이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로 나아간 과정을 추적하며, 이건희의 작업을 ‘칼리그램(Calligramme)’의 현대적 변주이자, 데리다의 ‘에크리튀르(écriture)’에 비견되는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으로 규정합니다. 디지털 매체 시대, 문자는 더 이상 의미 전달의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이미지로 전환되고 파편화되며 끊임없이 부유합니다. 이건희는 바로 그 ‘읽혀지지 않는 문자’, ‘이미지화된 기호’의 난립 속에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조형적 가능성을 동시에 포착하며, 지금 이 시대의 시각적·언어적 풍경을 한지 위에 고스란히 아카이빙합니다.
이 책에는 한지 콜라주, 아크릴로 써내려간 일기체 문자 회화, 그리고 2013년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갤러리 전시 설치 전경 등 <리버스> 연작의 다채로운 변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매일매일 자신의 일상을 깨알같이 써내려가지만, 그 글자들은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바탕이 되고, 층층이 쌓이며 예기치 않은 형상과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탄생하는 것은 ‘의미 없는 기호의 집적’이자 ‘살아있는 조형의 풍경’입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문자와 그림, 의미와 감각이 분리 불가능하게 뒤엉킨 이건희만의 회화적 사유를 경험하며, 우리 시대 소통의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성찰하는 깊은 울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민병직,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 중에서]
종이 위에 그린 글자들, 혹은 써내려간 그림
이건희 작가의 작업을 봤을 때 느끼는 가벼운 곤혹스러움은 작가의 작업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다소간의 난감함이다.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간 그림 같기도 하고, 동시에 종위 위에 그린 글자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를 그저 말장난 같은 수사학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작가의 작업이 글과 그림,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꽤나 오래된 진중하고도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연결점, 혹은 단서 또한 있으니 작가의 작업이 종이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여느 작가들과 달리 이러한 종이에 대한 접근과 사유가 작업의 중심축을 형성하면서 작업이 가진 스펙트럼과 깊이를 더해갔다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Rebus> 연작들은 일종의 칼리그램처럼 조형성과 결합된 문자들이 가득한 이미지의 풍경을 보여준다. 직접 제작한 수제 한지 위에 깨알 같은 문자들이 바탕을 이루기도 하고, 의미를 탈각한 문자들이 화면 속에서 배열, 중첩되기도 하면서 산포된다.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떠다니는 전자 매체 시대의 풍경 같기도 하지만 바탕을 이루는 한지의 질감이나 문자 이미지가 갖고 있는 조형성이나 표현성, 배열상의 구성미 역시 마찬가지로 부각되는 작업들이다. 이미지와도 같은 글자들의 자유로운 유희가 엮어내는 구성 자체에서 회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작가의 경우 이러한 구성이 의도된 것 못지않게,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킨 작가의 일상의 심적 상태마저 담아내니 그 예기치 않은 조형성은 더욱 도드라진다.
서평
읽을 수 없는 문자가 그려내는 풍경 — 디지털 시대, 소통의 불가능성과 회화의 존재론을 동시에 사유하다
우리는 매일 수천 개의 문자와 이미지 속에 살아갑니다. SNS의 짧은 댓글, 읽다 만 기사 제목, 의미를 알 수 없는 인터넷 밈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소통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대부분의 메시지는 의미 없이 흘러갑니다. 이건희 작가는 바로 그 ‘읽혀지지 않는 문자들’의 범람 속에서 우리 시대의 초상을 발견합니다. 직접 뜬 한지 위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그녀의 일기는 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가독적인 문자들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낸 화면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동시에 기이하게 불안합니다. 그것은 의미 전달에 실패한 언어의 잔해이자, 순수한 조형으로 거듭난 회화의 승리입니다.
민병직은 이 작업을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이라 명명하며, 미셸 푸코의 칼리그램 논의와 데리다의 에크리튀르 개념을 경유해 이건희 작업의 미학적 좌표를 정교하게 제시합니다. 그의 비평은 이 책을 단순한 작품집 이상으로 만듭니다. 독자는 작품 이미지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뿐 아니라, 그 이면에 흐르는 철학적 사유 — 문자와 이미지의 오랜 긴장, 기록매체의 역사적 변천, 그리고 한지라는 전통 매체가 지닌 물성과 조형성의 현대적 복권 — 를 함께 음미할 수 있습니다. 이건희는 기술이 아닌 사유로, 트렌드가 아닌 본질로 회화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진정한 작가입니다.
지금,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진짜 의미를 찾지 못해 지친 분들, 그림과 글의 경계에서 새로운 미적 경험을 갈망하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당신은 ‘읽을 수 없음’이 때로는 ‘볼 수 있음’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역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희의 <리버스>는 우리 시대의 언어적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자, 회화가 여전히 세계를 사유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임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저자 소개
이건희
이건희 작가는 하자를 이용한 다양한 기법에서의 변화 이미지를 작업 모티브로 삼아 작업하고 있는 작가이다.
작품들은 단순히 소통적 사실을 문자 그대로의 전달그림으로 재연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오늘의 회화로서의 칼리그람’을 새롭게 정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몇 가지 수단과 방법을 밝힘으로써 칼리그람이 여전히 회화의 정통보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테면, 전통종이와 전자종이의 대비에서 시각에서,
기법적으로는 꼴라지와 캐스팅, 자읍들의 발침과 비읍, 글 것과 작은 것, 누움과 세움, 장방과 직분은 모든 중첩과 질의 표현을 농숙하게 연출한다.
홍익대학교에서 문자작업에 있어 물성과 형상성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 부산, 일본, 미국 등 18여회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시카고 아트페어, 칼스루에 아트페어 그리고 부산시립미술관기획의 논리전,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아시아작가전, 2013 소피아 국제 종이비엔날레 등에 출품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의료원 등에 소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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