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텅 빈 벌판과 야윈 인물들, 덜 그려서 더 깊어지는 실존의 회화
이 책은 화가 최인호의 회화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집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16년 신작까지의 회화와 드로잉, 조각을 함께 수록하였으며, 심상용·유경희·류병학 세 평론가의 비평을 통해 작가의 작업을 다각도로 조망합니다. 독자들은 텅 빈 구도와 메마른 붓질, 뼈대만 남은 듯 야윈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쓸쓸한 화면을 통해 삶과 실존에 대한 작가의 오랜 태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상용은 최인호의 화면을 ‘덜 그리기’로 포착하는 삶의 우수라 명명하며, 화려한 묘사 대신 흙이나 연탄재 같은 거친 재료로 메마른 실존을 구체화하는 그의 회화적 전략을 치밀하게 풀어냅니다. 유경희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는 은유를 통해 작가의 분신들이 서성이는 텅 빈 ‘존재의 방’을 짚어내고, 류병학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경유해 1996년 설치 연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놀이로 해체합니다.
책은 <이태원 엘레지>, <꿈꾸는 식물>, <바라본다>, <Drawing & Sculpture> 네 장으로 구성되어 조기 한 손을 든 남자, 어린왕자, 이태원의 밤거리를 떠도는 인물들까지 다양한 화폭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전시장을 벗어나 책으로 묶인 이 그림들은 화려한 수사를 거두고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 곁에 머물러 온 한 화가의 긴 여정을 증언합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심상용, 「실존을 추적하는 언어체계, 또는 ‘덜 그리기’로 포착하는 삶의 우수」 중에서]
최인호의 세계는 대체로 휑한 구도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들과 그것들에 동반되는 건조한 대기로 대변될 수 있다. 작은 돌기들을 포함하는 조심스럽게 거친 마티에르와 지극히 낮게 조율된 채도에 의해 메마름은 더 구체적인 것이 된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나 청명한 대기는 최인호의 세계가 수용하기 어려운 가치의 대변자들임을 분명히 하자. 그러한 것들은 결코 실존적 삶의 제대로 된 묘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잿빛이거나 황사 낀 듯 뿌연 대기와 그 층들을 뚫고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제한된 시계가 오히려 미덕이다. 가까운 것들의 윤곽마저 희미한 것으로 만드는 제한된 시계가 이 세계의 상황들을 훨씬 더 실존적인 뉘앙스를 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최인호는 분명히 덜 그림으로써만 가능한 어떤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색은 화려한 묘사를 위해 화학적으로 제조된 안료의 극적인 효과와 무관하다. 최인호는 안료로서 오히려 울타리 밖의 것들, 일테면 흙이나 연탄재를 더 선호한다. 안료를 개는 순간부터 모더니즘 회화의 신화는 기꺼이 버려진다. 붓질에는 아쉬움이나 망설임의 흔적이 완연하다. 마티에르는 오히려 소극적이다.(앵포르멜의 오트파트를 생각해보라) 이 노선은 인물들에서 묘사적인 성격의 동작을 덜어낼 때 비로소 명료해진다.
서평
비어 있어서 더 깊은, 최인호의 실존적 회화
최인호의 그림 앞에 서면 무엇이 그려졌는가보다 무엇이 비워졌는가를 먼저 묻게 됩니다. 황량한 벌판, 낮은 채도의 하늘, 뼈대만 남은 듯한 인물들은 화려한 수사 대신 침묵으로 말을 건넵니다. 평론가 심상용은 이를 ‘덜 그리기’로 포착하는 삶의 우수라 부르며, 결핍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실존의 언어라고 읽어냅니다.
유경희는 이 황량함의 뿌리를 작가의 내밀한 자아에서 찾습니다. 텅 빈 방, 벽으로 막힌 공간, 얼굴이 지워진 분신들을 통해 홀로 남겨진 자의 시간을 복원하고, 그 쓸쓸함이 비루함이 아니라 자존의 흔적임을 짚어냅니다. 류병학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빌려 와 작가의 설치 작업을 해체하며,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놀이를 추적합니다.
이 책은 화려한 미술사적 수사 대신 가난하고 야윈 존재들의 편에 서온 한 화가의 오랜 태도를 보여줍니다.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책장을 덮을 때쯤, 비어 있는 것들이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자 소개
최인호
최인호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수학하였다.
<꿈-떠도는 별>(아라아트, 서울, 2016), <이태원 엘레지>(갤러리아쉬-서래, 서울, 2015), <꿈꾸는 식물>(갤러리 담, 서울, 2013), <바라본다>(써니갤러리, 헤이리, 2011), <첫 꿈>(아트사이트, 서울, 2009) 등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파리의 세브르 화랑과 이씨레 물리노 전시관 등에서도 전시하였다.
이 밖에도 파리의 살롱 드 메, 살롱 도똔느 등 다수의 살롱전과 KIAF, SOAF 등 국내 아트페어, 다양한 그룹전에 참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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