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흙과 불로 빚어낸 생명의 서사: 서혜경 작가 35년 회고
이 책은 회화를 전공하고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경험한 뒤 테라코타라는 독자적 조형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일궈온 서혜경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 첫 회고 화집입니다. 꽃·사람·숲·풀이라는 네 개의 큰 주제로 나뉜 이 책에는 2013년 첫 개인전 <꽃담>부터 2025년 최신작 <서천 꽃밭>까지, 흙을 빚고 새기고 채색해 1100~1200도에서 구워낸 테라코타 작품 100여 점이 실려 있습니다. 단순한 작품집을 넘어, 도재기·조은정·김종목·김준기·김종길 등 5인의 미술평론가가 쓴 비평 6편과 작가 자신의 작업 노트가 함께 수록되어, 흙과 불이라는 물질과 대면하여 생명과 죽음, 자연과 인간, 신화와 현실을 탐구해 온 그녀의 예술 여정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서혜경의 작품은 흙 고유의 색과 질감을 살리기 위해 중저화도(1100도 산화소성)에서 초벌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파편은 결함이 아니라 흙의 물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적극 활용되며,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부조로 새겨 넣어 가까이에서는 흙의 질감을, 멀리서는 나무와 숲의 형상을 감상하게 하는 독창적인 방법론을 구축했습니다. 제주도 무속신화 ‘이공본풀이’의 서천꽃밭에서 영감을 받은 <생불꽃> <살오를꽃> <웃음웃을꽃> 연작, 민중미술 대표 작가 오윤을 오마주한 연작, 새만금 갯벌과 일용직 노동자 등 사회적 현실을 담은 <사람, 가장 위험한> 시리즈, 그리고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을 픽셀로 구현한 <숲> 연작까지, 그녀의 작품은 생명의 순환과 치유, 억압받는 존재에 대한 연대, 그리고 자연생태의 소중함을 흙불그림이라는 고유한 언어로 풀어냅니다.
책에 실린 비평들은 서혜경 예술의 핵심을 정교하게 포착합니다. 도재기는 신화 속 민중의 굳센 삶과 상처를 치유와 희망의 테라코타로 품어낸 작가의 의지를 조명하고, 조은정은 전통의 현대적 변용과 균열이 만들어내는 ‘경계를 무화시키는 틈’의 미학을 분석합니다. 김종목은 지식인의 위선에서 불안정 노동, 파괴된 갯벌까지를 ‘구운 흙으로 그린 한국사회’로 읽어내며, 김준기는 풀꽃나무와 사람을 아우르는 ‘흙불그림’의 생명 예찬을 강조합니다. 김종길은 서혜경의 작품이 질료와 이미지의 2중 구조 속에서 ‘아리아, 꽃 숲의 여울’처럼 생명의 선율을 울려 퍼뜨린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는 설치 작품의 한계를 넘어, 흙과 불로 빚어낸 생명의 서사를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독자들에게 생명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태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은 울림을 전달할 것입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작가노트 중에서]
흙은 내게 물감이고 캔버스이다. 그림그리는 재료이다. 흙은 나에게 늘 가슴 뛰게하며, 부단히 움직이게 한다. 나의 작업은 흙 고유의 색과 질감을 드러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일환으로 중저화도(1100도 산화)에서 초벌만 한다. 중저화도는 흙의 강도가 강화되면서도 흙의 색을 유지한다. 재벌, 혹은 높은 온도(1250도)에서 구워 진 흙은 돌이나 유리성질로 변질 되기 때문이다.
파편, 균열은 역시 흙의 성질은 강조한것이다. 파편을 통해 흙의 두께, 무게감 그리고 색이 드러난다. 깨질 때 만들어지는 자유로운 선들은 건축에 쓰이는 타일과 같은 칼로 잘려진 직선의 사각형을 무마시키는 시각적인 효과도 있다. ‘픽셀(pixel)’은 디지털이미지 최소 단위이다. 픽셀이 크면 클수록 형체가 흐려지고 작으면 작을수록 형체가 선명해진다. 나는 붓으로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닌 픽셀의 크기대로 조각을 해서 높낮이의 변화를 주어 형태를 만들었다. 관람자는 가까이에서 흙의 질감 느끼고 점점 뒷걸음으로 작품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흙은 나를 가슴 떨리게도 하지만 그 무게때문에 고단하고 작업과정이 지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흙에게서 기다림도 배우고 긍정도 배운다.
서평
흙과 불의 대화로 피워낸 생명의 아리아,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
서혜경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묘한 긴장과 울림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흙의 거친 질감과 균열이 눈에 들어오고, 한 발짝 물러서면 비로소 꽃과 나무, 숲의 형상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녀는 회화를 전공했지만 캔버스와 물감 대신 흙과 불을 선택했고, 픽셀이라는 디지털 개념을 아날로그 테라코타에 접목시켜 독보적인 조형 언어를 창조해 냈습니다. 이 책은 그 놀라운 여정의 결정체입니다. 제주 신화의 서천꽃밭, 민중미술의 오윤, 새만금 갯벌의 노동자, 자작나무 숲의 서정까지 그녀의 작품은 생명과 죽음, 자연과 인간, 억압과 연대라는 거대한 주제를 흙불그림이라는 고유한 미학으로 풀어냅니다.
5인의 평론가가 쓴 비평은 서혜경 예술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도재기는 신화 속 생명의 꽃들이 치유와 희망의 상징으로 구워졌음을 밝히고, 조은정은 균열과 파편이 만들어내는 ‘틈’이 경계를 무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고 분석합니다. 김종목은 그녀의 작품을 ‘구운 흙으로 그린 한국사회’로 읽어내며, 김준기는 풀꽃나무와 사람의 이야기가 흙과 불의 정교한 노동을 거쳐 생명 예찬의 서사로 완성된다고 강조합니다. 김종길은 픽셀과 균열이 만들어내는 2중 구조 속에서 질료와 이미지가 ‘아리아’의 선율처럼 울려 퍼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층적 해석은 단순히 아름다운 공예품을 넘어, 서혜경의 테라코타가 생명과 죽음, 현실과 신화를 가로지르는 철학적 사유의 장임을 일깨웁니다.
지금, 삶의 본질을 묻는 예술이 필요한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흙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고 돌아가는 대지이자, 생명이 움트는 근원입니다. 서혜경은 그 흙을 빚고 새기고 불에 구워 우리에게 생명의 순환과 치유, 연대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일상 속 작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우주를 품은 생명으로 다가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혜경의 흙불그림이 전하는 생명의 아리아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저자 소개
서혜경
서혜경은 독일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 순수조형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마이스터슐러(Meisterschülerin)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녀는 동양철학의 개념인 ‘이숙(異熟)’—즉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모든 존재의 다른 성장, 다른 방식의 성숙’—을 바탕으로 《유기체적 풍경 IV》(광주 예술공간집, 2025), 《싹 그리고 정물화: 살아있는 것의 소고》(서울 트렁크갤러리, 2016), 《Metamorphosis》(서울 갤러리 쿤스트독, 2008), 《일상의 성소(聖所)》(서울 포스코미술관, 2005), 《이숙(異熟)》(서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02), 《시대착오적인 산책》(베를린 스틸 운트 부르흐 갤러리, 1994) 등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ana〕: Please keep your eyes closed for a moment》(샤르자 마라야아트센터, 2015), 《제9회 광주비엔날레 – 라운드테이블》(광주 무각사, 2012), 《Nomadic Report 2012: 남극–살리다》(서울 아르코미술관, 2012), 《Greening Green》(서울 아르코미술관, 2010), 《보태니카》(부산시립미술관, 2018), 《부드러운 권력》(청주시립미술관, 2018), 《환 태평양의 눈: 숨비소리》(제주도립미술관, 2009), 《자연과의 대화》(일본 아오모리 현대미술관, 2004) 등 다양한 국내외 전시 및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남극, 칼 호퍼 재단(베를린), 아오모리 현대미술관(아오모리현),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서울) 등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다양한 문화·역사·장소특정적(site-specific)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왔다. 작업의 주요 주제는 생명성의 메타포, 치유, 삶의 경험에 대한 체화이며, 자연과 살아있는 식물성, 소금 등을 매개로 실험적 조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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