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아줌마의 일상이 예술로 피어나다: 이혜경, 35년의 온기 어린 여정
이 책은 화가 이혜경이 1986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 3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딸’, ‘아내’, ‘엄마’, ‘집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며 그려낸 작품 세계를 집대성한 기록입니다. 독자들은 화려한 꽃무늬 천 조각을 오려 붙인 초기작 <보따리>에서 시작해, 가족의 일상을 오브제와 혼합재료로 담아낸 <밥> 시리즈, 그리고 2024년 해남 소풍 이후 펼쳐진 <배추밭> <파밭> <산책> 등 신작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 예술가가 일상의 제약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기 언어를 벼려온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작가가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이승미, 김진아, 정명선, 유영희, 오혜주 등 비평가들의 깊이 있는 텍스트, 그리고 딸 박영서의 진솔한 에세이가 담겨, 작품을 둘러싼 삶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명합니다.
이혜경의 작품은 양장점 집 딸로 자라며 익힌 천에 대한 감각과 섬세한 손끝 기술이 회화와 만나 탄생한 독특한 조형 언어를 보여줍니다. 1990년대 <자화상> <빨래널기> <바느질>에서는 육체가 빠져나간 헐렁한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여성의 정체성을 탐색했고, 2000년대 <밥> 시리즈에서는 진주알, 십자가, 물고기, 꽃 등 온갖 아름다운 오브제를 밥그릇에 켜켜이 쌓아 올리며 ‘엄마’로서의 헌신과 사랑을 은유적으로 담아냈습니다. <가족도> 연작에서는 집안일에 파묻혀 모퉁이에 서 있는 엄마와, 각자의 공간을 편안하게 차지한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일상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이 작품들은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을 따뜻하고도 날카롭게 포착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당연하게 여겼던 ‘사랑’과 ‘돌봄’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2024년 해남으로 떠난 소풍은 이혜경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붉은 황토밭과 고구마밭,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들녘, 대흥사의 동백과 매화를 만나며, 작가는 오랜 시간 미뤄두었던 자기 자신과의 재회를 경험했습니다. 이후 제작된 신작들에는 ‘딸’ ‘아내’ ‘엄마’로서의 ‘그녀’가 아닌, 성숙한 예술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풍경과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리고 붙이고 꿰매고 그리는 원초적 예술 행위를 통해 쏟아져 나온 이 작품들은, 여성 예술가가 일상의 구조를 통과하며 어떻게 고유한 창작 세계를 형성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책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는 설치 작품들과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해 온 작가의 내면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긴, 한국 여성 미술사의 소중한 아카이브입니다. 독자들은 이혜경의 작품을 통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예술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줌마’라는 이름 속에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숨 쉬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책 속으로
[본문 발췌: ‘엄마, 소풍가다’_여성 예술가 이혜경의 회화 다시 읽기(이승미) 중에서]
이혜경의 예술세계는 예술가 이혜경의 삶을 넘어, 여성 예술가에게 요구되어온 역할과 기대의 구조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미술대학 지망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림 그리는 일’을 스스로 삶의 중심에 두어왔으나, 여성 예술가로 살아온 그녀에게 추가된 다른 이름들, ‘딸’, ‘아내’, ‘엄마’는 예술가로서의 욕망과 의지와 지속적으로 충돌하며, 한편으로는 의지하며 지속 되었다. 그녀의 창작활동은 언제나 가능성과 제약, 열망과 책임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어왔다.
2024년, 이혜경 작가는 여성작가동료들과 함께 두 차례 해남을 찾는다. 이 소풍은 작가에게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는 여행이면서, 동시에 여성 예술가로서 다시 숨을 고르는 일종의 ‘예술적 자아의 회복’으로 작용했다. 시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온 붉은 황토밭과 끝없이 펼쳐진 고구마밭을 지나며 마주한 들녘, 붉은 해가 바다로 빠지고, 아침 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임하도, 해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몸을 뒤척이는 파도소리, 늦은 봄 지천으로 핀 야생의 꽃들, 가을 단풍으로 물든 대흥사로 이어지는 길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오랜 시간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과의 재회의 순간으로 작용했다.
2025년 봄소풍 이후 제작한 작품 <배추밭> <파밭> <물끄러미> <해남풍경> <소풍> <산책>과 같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딸’ ‘아내’ ‘엄마’로서의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성숙한 예술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엄청난 작품이 예고되고 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화가 이혜경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서평
밥그릇에서 꽃밭으로, 아줌마가 펼치는 따뜻한 예술의 세계
이혜경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묘한 이중성을 경험합니다. 화려한 천 조각들로 꾸며진 밥그릇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반복되는 살림과 돌봄 속에서 지쳐가는 ‘엄마’의 한숨이 담겨 있습니다. 가족들이 편안히 자리 잡은 집 모퉁이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공감을 넘어 서늘한 울림을 줍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혜경의 예술은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그녀는 ‘아줌마’라는 무성적 존재, 생활력만 있는 존재로 치부되던 여성들의 삶을 예술의 언어로 꿰매어 냅니다. 진주알을 쌓아 올려 만든 밥 한 공기, 물고기와 십자가로 장식된 밥그릇, 조각보처럼 이어 붙인 천 위에 수놓은 일상의 풍경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시(詩)입니다.
이 책이 특히 감동적인 이유는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화해 온 작가의 내면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육체가 빠져나간 헐렁한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던 작가는, 2000년대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밥그릇에 담아 ‘프로 엄마’가 되었고, 2024년 해남 소풍 이후 드디어 밥그릇을 벗어나 꽃과 밭과 자연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딸 박영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드디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서.” 이승미, 김진아, 정명선, 유영희, 오혜주 등 비평가들의 글은 이러한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하며, 이혜경의 작품이 단순히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한국 사회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을 담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며 따뜻한 위로가 밀려옵니다.
육아와 살림 속에서 지쳐가는 부모님, 일상에 갇혀 자신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이혜경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예술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줌마’라는 이름 속에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숨 쉬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책을 덮는 순간, 여러분은 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 빨래 널기, 청소하기와 같은 소소한 일상이 결코 하찮지 않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받아 왔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혜경의 따뜻한 초대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아줌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온 마음에 경계가 허물어지며 순수한 ‘찰나’의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자 소개
이혜경
이혜경(李惠卿, Lee, Hye-Kyoung)은 1963년 경기 수원에서 태어나 1986년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0년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2025년 <엄마 소풍가다>(스페이스결, 행촌미술관, 인제 기적의 도서관)를 비롯하여 2023년 <시간을 담다>(스페이스 결), 2020년 <일상을 품다>(파비온드 갤러리), 2013년(담 갤러리, 정월행궁나라 갤러리), 2009년(대안공간 눈), 2006년 <일상과 표정>(대안공간 눈), 1998년(갤러리 아트넷), 1997년(나무화랑, 갤러리 아트넷) 등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2025년 <책 읽는 정원>(산이정원), <동백 매화소풍전>(스페이스결, 행촌미술관), 2024년 <해남의 아름다운 맛>(행촌미술관), 2022년 <보이지 않는 선-이혜경 장진경 2인전>(갤러리 한옥), <행궁유람 행행행>(수원시립미술관), 2015년 <수원 지금 우리들>(수원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 2011년 <행궁동 사람들 행궁동을 기억하다>(대안공간 눈), 1997년 <삼백개의 공간>(서남미술전시관, 담갤러리), 1988년 <앙데팡당전>(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 다양한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2025년 이마도 창작레지던시에 참여하였으며, 작품은 스페이스 결, 행촌미술관, 대안공간 눈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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